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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풍경, 마음 그리고 기억

by luthersoul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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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네 인물의 흔들리는 감정을 통해 도시 서울의 공기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1990년대, 지금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던 그 시절의 서울. 그곳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복잡하고, 더 외로웠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시간의 겹을 따라 흐르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공허함과 불안을 도시의 풍경 안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출처: 나무위키

회색빛 도시, 정지된 감정의 풍경

1990년대 서울은 그리 밝지 않았다. 고층 빌딩이 늘어서기 전, 재개발 전의 그 도시에는 수많은 골목이 있었고, 술집 간판 아래 희미한 형광등들이 밤을 지탱하던 시기였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 공간들을 천천히 훑는다. 말 없는 커피숍, 적막한 거리,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 좁은 여관방.

영화는 사건을 쫓지 않는다. 대신 서울이라는 공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느린 걸음, 미묘한 시선, 애매한 관계 속 침묵을 담는다. 서울은 배경이 아닌, 감정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처럼 작동한다. 회색빛 조명 아래서 사람들은 웃지도 울지도 않고, 그저 견디며 살아간다.

카메라는 서울을 빠르게 스쳐 가지 않는다. 오래 머무르며 관찰하고, 인물들을 도심 속에 놓인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삼켜왔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도시에서 멀어진 마음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 사람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 도시에 속해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작가는 글을 쓰지 못하고, 유부녀는 삶이 무겁고, 세일즈맨은 진심이 어색하고, 카운터 직원은 사랑을 몰라서 아프다.

서울은 이들에게 익명성을 준다. 편의점 알바생에게 말을 걸 수도 있고, 술집에서 이름을 숨긴 채 진심을 고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익명성은 곧 고립으로 변한다. 누군가 곁에 있어도 가까워지지 못하고, 거리를 좁혀도 끝내 닿지 못하는 마음들. 서울은 이 모든 감정의 간극을 당연한 듯 품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정서의 거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침묵과 망설임, 시선의 흔들림, 말끝의 끊김까지. 이 모든 디테일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공기와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이상할 만큼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홍상수의 서울, 그리고 우리의 기억

홍상수 감독이 그린 서울은 지도에서 보는 도시가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오르고, 간판 밑에서 기다리는 일상의 연속이다. 그는 특별한 장치를 쓰지 않는다. 인물의 동선, 자연광, 그리고 평범한 대사를 통해 서울을 그려낸다.

놀랍게도 이 서울은 90년대 영화임에도 지금의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관계는 어렵고, 사랑은 확신이 없으며, 외로움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과거의 기록이 아닌, 지금도 유효한 감정의 아카이브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통해 우리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 공간과 감정이 절묘하게 교차하며,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 서울을 되묻게 한다. 이 영화 속 서울은 낯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내가 오래전에 서 있었던 골목에 다시 도착한 기분을 주는, 그런 도시다.

결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90년대 서울의 감정과 공기를 정밀하게 담아낸 영화다. 소리 없이 흐르는 불안, 거리보다 먼 관계, 입 밖에 내지 못한 감정들이 조용히 화면을 채운다. 도시의 풍경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 작품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현재를 다시 이해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같은 서울 안에서 비슷한 외로움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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