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은 초등학생들의 세계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성장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관계’와 ‘소속’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어른조차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감정의 층위를 고요하게 펼쳐 보입니다. 화려한 장치 없이도 강한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은 우정, 따돌림, 상처라는 키워드를 통해 다시 볼수록 깊어지는 감정의 결을 전해줍니다. 지금 다시 『우리들』을 마주하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의 과거와 오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우정은 언제나 순수할까? 관계의 시작과 균열
영화는 선(최수인 분)이라는 소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친구가 없어 혼자 노는 선은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전학 온 지아(설혜인 분)를 만나고, 두 아이는 짧은 시간이지만 깊은 친밀감을 형성합니다. 둘만의 놀이, 비밀, 속삭임은 어린 시절 우리가 경험했던 ‘진짜 친구’의 순간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개학 후 지아가 기존 무리에 섞이면서, 두 아이의 관계는 균열을 맞습니다. 지아는 선을 모른 척하고, 선은 그 외면 속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이 장면들은 어른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과 사회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복잡한 감정선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우정은 언제나 순수한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든 관계가 순수하고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를 감상적으로 그리지 않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배제의 감정을 직시합니다. 우정이란 말없이 시작되지만, 쉽게 어긋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크고 작은 심리적 고통을 겪습니다.
따돌림, 말보다 더 아픈 침묵의 폭력
『우리들』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폭력이란 꼭 물리적이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정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따돌림은 폭언이나 구타가 아니라, 의도적인 무시, 배제, 침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선은 지아와의 관계가 틀어지자, 학급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놓입니다.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모습, 교실에서 조용히 도시락을 먹는 장면, 무리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모습—all of these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정서적 폭력의 형상입니다. 특히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말없이 만들어지는 ‘서열 구조’는 어른의 세계 못지않은 위계와 잔혹함을 품고 있습니다. 감독은 이러한 따돌림을 과장하거나 희화화하지 않고, 아이들이 처한 현실 그대로를 담담히 관찰합니다. 선이 울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조용히 외로움을 견디는 모습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남깁니다. 말보다 더 강한 침묵의 폭력이란 무엇인지,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깊게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와 성장, 그리고 용서의 감정
『우리들』의 마지막은 상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선은 자신의 아픔을 지아에게 고백하고, 지아 역시 자신이 받은 상처를 털어놓습니다. 두 아이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감정을 공유하고 성장해 갑니다. 이는 어른들도 쉽지 않은 ‘용서’라는 감정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건, 영화가 그 어떤 교훈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누구도 완전히 잘못되지 않았고, 누구도 완전히 옳지도 않습니다. 선과 지아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그 속에서 실수하고, 때로는 아프게 만납니다. 이 모든 과정이 곧 성장의 한 부분임을 영화는 조용히 전달합니다. 또한, 선이 자신의 동생에게 보여주는 따뜻한 관심, 어른들의 말과 시선을 곱씹는 모습 등은 아이가 자라나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 장면들입니다. 『우리들』은 성장영화이자 동시에 감정의 성숙을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우리들』은 겉보기에 단순한 초등학생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겪었던 모든 관계의 고민, 외로움, 갈등, 그리고 작은 화해의 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라고 쉽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사람 사이의 거리와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조용히 되짚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른이 되어도 잊지 못하는 어떤 감정, 혹은 설명하지 못한 채 남겨진 상처가 있다면, 『우리들』은 그 기억을 꺼내어 위로해 줄 작품입니다. 이 조용한 걸작은, 우리의 지난 감정과 대화하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우리’의 의미를 되묻는 이 영화는 그래서 지금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